그곳에 예수는 없다.


본문말씀

히브리서 13장 10~16절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배달의 민족이야기

최근에 집들이를 했습니다. 제가 한턱 내고자 호기롭게 주문을 했죠. 한 시간이 지났을까요? 음식은 오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 집 앞에 두고 갔다는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저는 황당해서 기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세요? 문밖에 음식이 없는데요?” 그런데 오히려 배달 기사는 더 짜증을 냈습니다. “아니! 집 앞에 뒀는데 무슨 말이세요! 대우실란트 3층 맞잖아요!” / “네?”

알고 보니 이사 후에 주소를 바꾸지 않고 주문해서 옛집으로 갔던 것이죠. 제가 잘못된 주소지에서 기다리고, 괜한 배달기사를 탓했습니다. ‘번지수 잘 못 찾았다’는 말이 이런 경우겠죠. 우리의 신앙도 마치 이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정모 없는 정모 집처럼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예수를 기다리곤 합니다. 특별히 이 종려주일 기간 우리의 눈은 자연스레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는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정작 예수님이 없다면? 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 그곳에 예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그곳에 예수는 없다

우리가 종려주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순절과 부활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달라집니다.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왜 매년 부활절이 다를까는 생각을 해봤을 것입니다. 부활절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을 기준으로 정해집니다.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 이후 첫 번째 주일로 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했습니다.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 이후 첫 번째 주일 = 부활절

그리고 부활절을 기준으로 평일 40일 전을 사순절이라고 부릅니다. 몸에 재를 뿌리고 거친 옷을 입어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단하는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예수의 삶을 묵상하는 평일 40일을 보냅니다.

사순절 마지막 전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로부터 평일 5일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의 고난을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를 따라잡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죽음으로 가득 찼던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밝아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희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올해 종려주일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매년 종려주일을 맞이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예수를 찾고 계신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은 사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에는 크게 두 그룹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우리가 잘 아는 군중입니다. 이들은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호산나라는 단어의 뜻은 오 우리를 구원하옵소서이자 짧은 기도문입니다. 군중은 지금 예수를 향해서 이제 폭군 헤롯왕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식 팍스 로마나를 이뤄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소원을 이뤄주기를 소망하는 그룹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모든 행적에 반론을 제시하고 비판하기 바쁩니다. 지금 누리는 것들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모른척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틀에 가두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삶이 변하고 세상이 새롭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삶의 변화를 거부하는 그룹입니다.

이 두 그룹은 모두 예수를 예루살렘 중심의 주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 그룹은 예수를 통해서 지배자가 되기를 꿈꾸고 한 그룹은 지금의 권력자를 위해 예수를 죽이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입성하시려는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자 은혜의 통로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이뤄졌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사장들은 저버린 이들입니다. 하나님보다 권력을 탐했습니다. 종교가 만들어 낸 힘과 이익과 영광에 영혼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어버린 사람들의 제사를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제단은 은혜가 비어버린 공간이 되었습니다. 매년 매일 하나님께 제사드리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은 제사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멈추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막혔다면 자신의 아들을 내어서라도 우리를 향한 구원의 길을 여시는 분입니다. 예수는 스스로 구원의 제물이 되시기로 결심하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내용은 딱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일 때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므온과 안나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할 때입니다. 그 외에는 늘 이스라엘 변두리를 돌아다니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 두 번을 제외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돌아다니셨을까요?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삶의 주 무대를 어디로 삼으셨을까요?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수도 예루살렘 밖, 예루살렘 성,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방에서 아웃사이더로 활동하셨습니다.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상기시켜봅시다.

예수님은 해산이 임박해 온 어머니, 마리아에게 방을 비워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야박함과 외면 속에서 마구간으로 쓰이던 춥고 눅눅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보러 온 것은 당대 사회에서 거칠고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목동들입니다. 마구간 변두리에서 태어난 이를 보러 온 첫 목격자 역시 사회에서 변두리에 머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예수님은 이민자 신세로 한동안 살았습니다. 출생하자마자 헤롯의 칼을 피해 이집트로 떠나게 되었고 거기에서 난민으로 지냈습니다. 난민… 단어가 너무 거칠고 투박하나요? 아뇨,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던 난민의 신세였음을 성서는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밖에서 정착한 유대인 이주 공동체를 ‘디아스포라’라고 말합니다. 이들 역시도 난민으로 시작했습니다. 전쟁과 정치적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베드로전서 11절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이렇게 인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1)

나그네, 파레피데모이스(parepidemois)의 번역어입니다. 이방인라는 뜻이죠. 주변부 이곳저곳 변방을 누비며 매번 낯선 환경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파레피데모스 παρεπίδημος, ον = 이방인, 순례자

예수님의 가족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먼 갈릴리 촌구석, 그것도 빈민굴과 우범지대로 악명 높은 나사렛에 정착했죠.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는 요한복음 1장 46절의 말처럼 그곳은 당대 최악의 주거지였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대부분을 종교,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의 가난하고 낙후된 동네와 이방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하셨죠.

예수님은 변방을 무대로 삼아 소위 상종 못 할 인간들이라 일컫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사회적으로 외면당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고 살아내셨습니다. ‘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말이죠.

사람들의 상처와 절망을 하나하나 끌어모으기 위한 것처럼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시면서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종교지도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이 있음에도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을 품고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그러셨을까요? 왜 굳이 변두리의 위치에서 낯선 자의 삶을 살아가며, 소외된 자들의 곁에 머무셨을까요? 오늘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12)

오늘 히브리서 12절에서 예수님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분이 성문 밖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죽은 성문 밖은 어떤 곳입니까? 예루살렘 성문 밖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쓰고 남은 희생의 찌꺼기를 버리는 곳입니다.

그 앞 절인 11절을 보면 속죄제를 집례하는 대제사장은 속죄물의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고 그 남은 찌꺼기들은 성문 밖에 버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성문 밖에는 누가 있습니까. 바로 성에서 거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 문둥병자와 같이 아픈 자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 머무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성문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그곳에는 스스로를 거룩하다 생각하는 제사장과 율법을 연구하는 바리새파가 있습니다. 성전세를 걷고 돈이 되는 비싼 희생 제물을 팔며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있었죠. 그곳에서 그들의 성전을 통해야만 용서받는다고 하며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었고 사회 지도층이 되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이스라엘의 중심, 예루살렘 그 성전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의 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해골이란 이름을 가진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셨습니다. 구원의 장소가 성전 즉 유대 사회의 중심부에서 성문 밖 변두리로 옮겨졌습니다.

즉 죄 사함과 구원의 선포라는 성전의 기능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으로 손수 감당하시면서 굴욕의 땅, 희생제물의 사체와 생활 쓰레기가 버려졌던 성문 밖이 지성소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것은 죽음과 같던 우리 인생, 변두리 인생, 짜투리 인생인 우리를 그분께서 긍정하시고 그러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끝내 자신마저도 불사르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이를 극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삼상 2:8)

고대 사회에서 거름더미란 성문 밖에 쌓아 놓은 인분 무더기입니다. 한나의 노래는 성문 밖에서 죽음으로써 변두리 인생들의 희망이 되신 분을 향한 예고입니다. 성문 밖에 죽은 예수를 소개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13)

사랑하는 강남대청 청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누구보다 밝은 빛과 뜨거운 온기되신 것은 가장 높은 보좌 위에서 가장 낮은 십자가의 자리까지 큰 낙하를 감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높아지는 삶을 향한 욕망을 포기하고 낮은 데로 내려오면 그 낮아짐의 폭만큼 누군가에게 따듯한 온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이 걷히고 하나님의 빛으로 채워지는 사순절, 우리가 찾는 예수는 예루살렘, 높고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곳, 욕망이 뒤섞인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실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어디에서 그리스도를 기다리십니까.

함께 나누는 기도

구원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곳에 모였습니다. 연약한 자들의 예배를 받아주옵소서. 높아지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주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셨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성문 밖으로 나아가 주님을 찾게 하옵시고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전하는 이가 되게 하옵소서. 모든 아픔과 상처를 품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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